정지영 감독의 신작 '내 이름은'이 40년 넘는 감독 경력에도 불구하고 제작비 확보의 어려움을 겪으며 개봉했다. 이 영화는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배경으로, 이름을 버리고 싶어 하는 소년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았다. 감독은 과거의 폭력이 세습되는 메커니즘과 가해자·피해자 중첩의 죄의식을 그려내고자 했다.
40년 넘게 영화를 제작해 온 노장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내 이름은'이 15일 개봉했다. 1983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이래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정 감독이지만, 이번 영화 '내 이름은'의 제작 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 초조하고 고생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감독은 "저라는 캐릭터는 무미건조해서 개봉 앞두고 초조하거나 잠 못 자고 하지 않는데 이번엔 다르네요. 고생을 많이 한 영화여서 그런지…"라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 크라우드 펀딩 통한 제작 과정
'내 이름은'은 제주 4·3 평화재단에서 진행한 공모전에서 당선된 각본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많은 영화 제작사들이 이 소재에 관심을 보였지만, 투자 유치가 성사되지 않아 영화 제작은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 감독은 처음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모으기로 결심했다. 함세웅 신부, 백낙청 교수, 조정래 작가, 현기영 작가 등 각계 원로들을 찾아가 제작추진위원회를 꾸리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렇게 모인 자금으로 영화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지만, 정 감독은 여전히 제작비 부족으로 인해 놓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감독은 "돈이 모자랐기 때문에 어려웠던 게 있죠. (제작비가) 더 충분했으면 아주 감동적인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 거라고 자부하죠"라며 충분한 예산이 있었다면 더욱 풍성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 4·3사건의 보편적 폭력과 죄의식
영화는 '영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어 하는 18세 소년(신우빈 분)과 그의 어머니 정순(염혜란 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쁜 기억을 묻고 살던 어머니 정순이 과거를 마주하게 되는 과정에서 제주 4·3사건의 아픔이 드러난다. 정 감독은 영화의 각본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초고를 여러 번 수정하며 이름을 찾는다는 기본 아이디어와 인물 구조를 다듬었다. 특히 제주 4·3사건을 영화의 배경으로 설정하는 것은 이러한 수정 과정의 일부였다. 다만, 영화는 4·3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1998년, 제주 4·3사건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시점을 배경으로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그려낸다. 아들 영옥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며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보여준다. 정 감독은 4·3사건과 영옥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병치한 이유에 대해 "과거의 폭력이 잠잠해지다가 멈추는 게 아니고 세습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집단 폭력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나는지도 보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영화는 등장인물을 단순한 피해자로만 규정하지 않고,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그려지는 복합적인 면모를 부각한다. 정 감독은 실제 4·3사건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하여, "피해자지만 가해자 역할을 한 사람도 있고, 한 동네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사는 경우도 있다"며,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중첩된 죄의식을 영화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민간인에게 총을 쏜 사람들 중에서도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나선 경우가 있었으며, 이들 모두 국가 폭력의 희생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 염혜란 배우와 차기작 구상
'내 이름은'은 정지영 감독의 작품 중 드물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이기도 하다. 어머니 정순 역을 맡은 염혜란 배우는 정 감독이 전작 '소년들'(2023)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그의 연기를 눈여겨본 후 '내 이름은'의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밝혔다. 정 감독은 염 배우에 대해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잡아내서 간단하면서도 쉽고 절절하게 표현해버렸다"며 "염혜란 배우가 한 시대를 주름잡지 않을까 싶다. 천부적인 연기자"라고 극찬하며, "정순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픈 역사, 큰 폭력의 역사를 거친 인물인데, 염혜란 씨가 잘 소화해준 거 같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현재 8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현역 최고령 감독으로 활동 중인 정 감독은 자신을 '거목'이 아닌 '중목'으로 칭하며, 작품을 계속 만드는 원동력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앞으로 작품을 만들 날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도, 사회의 급변 속에서 자신의 소재를 관객들이 계속 좋아해 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정 감독은 여전히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으며, "많이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다음 작품 준비하고 있는데 그다음 작품은 뭐할지를 생각 안 해요. 이 작품 끝나고 지금 준비하는 작품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다음 작품까지만 준비하고 있습니다"라며 꾸준히 이어갈 창작 활동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