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은 40년 넘는 영화 경력 중 '내 이름은'이 가장 고생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 1억 2천만 원을 모금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감독은 영화에 중첩된 죄의식과 세습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담아내려 했다.
40년 넘게 한국 영화계를 지켜온 정지영 감독이 신작 '내 이름은'에 대한 남다른 소회를 밝혔다. 1983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이후 15일 개봉하는 '내 이름은'까지, 감독의 영화 인생은 굴곡진 제작 과정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정 감독은 "저라는 캐릭터는 무미건조해서 개봉 앞두고 초조하거나 잠 못 자고 하지 않는데 이번엔 다르네요. 고생을 많이 한 영화여서 그런지…."라며 이번 작품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 4·3사건 소재 영화, 투자 혹한기 경험
'내 이름은'은 제작 단계부터 험난한 여정을 거쳤다. 제주 4·3 평화재단의 공모전 당선작 각본을 바탕으로 영화화가 추진되었으나, 4·3사건이라는 민감한 소재 탓에 투자 유치에 난항을 겪었다. 많은 제작 시도가 무산된 가운데, 정 감독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 마련이라는 쉽지 않은 길을 택했다. 함세웅 신부, 백낙청 교수, 조정래 작가, 현기영 작가 등 각계 원로들의 도움으로 제작추진위원회를 꾸렸고, 결국 1억 2천만 원의 제작비를 모금하여 영화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정 감독은 "돈이 모자랐기 때문에 어려웠던 게 있죠. (제작비가) 더 충분했으면 아주 감동적인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 거라고 자부하죠."라며 자금 부족으로 인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 '내 이름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빛 본 사연
영화 '내 이름은'은 '영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어 하는 18세 소년과 그의 어머니 정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쁜 기억을 묻고 살던 정순이 과거와 마주하게 되면서 제주 4·3사건의 아픔이 드러나는 구조다. 정 감독은 4·3사건을 영화의 전면으로 내세우기보다, 1998년 4·3사건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시점을 배경으로 아들과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했다. 아들 영옥의 학교생활을 비중 있게 다루며 또 다른 폭력을 조명한 데 대해, 정 감독은 "과거의 폭력이 잠잠해지다가 멈추는 게 아니고 세습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집단 폭력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나는지도 보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 폭력의 세습과 중첩된 죄의식, 영화에 담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을 단순한 피해자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폭력의 피해자들이 동시에 폭력의 가해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정 감독은 이러한 설정에 대해 실제 4·3사건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던 현실을 반영했다고 밝혔다. 그는 "피해자지만 가해자 역할을 한 사람도 있고, 한 동네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사는 경우도 있다"며 "제주도에 4·3사건을 겪고서도 식구들에게 얘기하지 못하고 쉬쉬하는 경우가 꽤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중첩된 죄의식을 영화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민간인에게 총을 쏜 이들 중 생존을 위해 나선 경우도 있었으며, 이들 역시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정 감독은 이번 작품이 그의 영화 중 드물게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순 역을 맡은 염혜란 배우는 정 감독이 전작 '소년들'(2023)에서 그의 연기를 눈여겨본 인물이다. 정 감독은 "염혜란 배우가 한 시대를 주름잡지 않을까 싶다. 천부적인 연기자"라며 극찬했다. 그는 "정순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픈 역사, 큰 폭력의 역사를 거친 인물인데, 염혜란 씨가 잘 소화해준 거 같다"고 평가했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신작을 선보이는 현역 최고령 감독으로서, 정 감독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사회가 급변하는데 내가 만들고 싶은 소재를 관객들이 계속 좋아해 줄지 의문"이라며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으면서도, 차기작 준비에 매진하고 있음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