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의 신작 '내 이름은'은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담고 있지만,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으며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됐다. 감독은 폭력의 세습과 중첩된 죄의식을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으며, 주연 배우 염혜란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40년 넘게 영화 외길을 걸어온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내 이름은'이 1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83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감독이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남다른 감회를 안겨준다. 정 감독은 14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나 "'내 이름은'은 고생을 많이 한 영화여서 그런지 개봉을 앞두고 초조함과 긴장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 투자 난항 겪은 '내 이름은' 제작 과정
'내 이름은'은 제주 4·3 평화재단이 진행한 공모전에서 당선된 각본을 바탕으로 기획됐다. 이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다는 이유로 많은 영화 제작 시도에도 불구하고 투자가 붙지 않아 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정 감독은 처음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제작비 확보를 결정했다. 함세웅 신부, 백낙청 교수, 조정래 작가, 현기영 작가 등 각계 원로들로 구성된 제작추진위원회를 꾸려 제작비를 모았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지만, 정 감독은 제작비 부족으로 인해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돈이 모자랐기 때문에 어려웠던 게 있죠. 제작비가 더 충분했으면 아주 감동적인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 거라고 자부합니다."
▲ 4·3사건 재조명과 폭력의 세습
정 감독은 '내 이름은'의 각본을 여러 차례 수정하며 완성해나갔다. 특히 제주 4·3사건을 영화의 주요 소재로 삼으면서도, 이를 전면으로 드러내기보다는 1998년을 배경으로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했다. 극중 아들 영옥(신우빈 분)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며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정 감독은 "과거의 폭력이 잠잠해지다가 멈추는 게 아니고 세습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집단 폭력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나는지도 보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정 감독은 등장인물을 단순한 피해자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영화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그려지는 인물들의 복잡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실제 4·3사건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피해자지만 가해자 역할을 한 사람도 있고, 한 동네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주도에 4·3사건을 겪고서도 식구들에게 얘기하지 못하고 쉬쉬하는 경우가 꽤 있는 이유입니다." 정 감독은 이러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중첩된 죄의식을 영화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민간인에게 총을 쏜 일부 인물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섰던 경우도 있었다며, 궁극적으로 이들 모두 국가 폭력의 희생자임을 강조했다.
▲ 배우 염혜란 향한 극찬과 감독의 지속적 열정
'내 이름은'은 정 감독의 작품 중 드물게 여성이 중심이 되는 영화다. 정 감독은 극중 어머니 정순 역을 맡은 배우 염혜란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했다. 염혜란은 정 감독이 전작 '소년들'(2023)에서 단역으로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역할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절절하게 표현해낸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정 감독은 "염혜란 배우가 한 시대를 주름잡지 않을까 싶다. 천부적인 연기자"라며 "정순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픈 역사, 큰 폭력의 역사를 거친 인물인데, 염혜란 씨가 잘 소화해줬다"고 극찬했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현역 최고령 감독인 정 감독은 자신을 '거목'이 아닌 '중목'으로 칭했다.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에 대해 그는 '운이 좋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작품을 만들 날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인식도 드러냈다. "사회가 급변하는데 내가 만들고 싶은 소재를 관객들이 계속 좋아해 줄지 의문입니다. 정지영 작품을 기다리는 관객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감독은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많이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 다음 작품 준비하고 있는데 그다음 작품은 뭐 할지 생각 안 한다. 이 작품 끝나고 지금 준비하는 작품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다음 작품까지만 준비하고 있다"며 여전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